영화를 보고 나온지 3시간째. 아직도 화가 안 풀린다. 화가 안 풀렸으니 중간중간에 욕이 섞일 것이다. 대충 이해하시라...
나는 79년생이고 2월에 태어났기에 7살이던 85년도에 학교를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한 것은 91년도 2월이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는 이른바 '대학교의 부속국민학교'이고 그 학교에서는 어린이날에 운동회를 하고는 했었다.
요즘에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잘 모르겠지만 80년대의 5월의 대학가는 매일 데모의 나날이었다.
운동회가 있는 5월 5일이면 부모님들이 학교에 오시고는 했다. 대학교 형들은 그 전날까지는 데모를 하다가도 그 당일에는 별일 없었다. (당연하지 노는날이잖아) 안 맡아본 사람은 모른다. 최루탄의 매캐함... 다음 날이 되어도 빠지지 않는 최루탄의 매캐한 냄새...
그런 냄새에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별 말씀 안 하신다. 그냥 아버지의 한마디. "좀 맵네"
요즈음은? 거리농성때문에 길이 조금 막혀도 항의가 빗발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90년대 말과 2000년대의 사람들이 사회의식이 너무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반응은 현대사회에 자신의 이익이 걸리지 않은 일에 대한 시민들의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그에 비교하면 80년대 중반과 말에는 저렇게 툭하고 "좀 맵네"라고 할 정도로 80년대의 의식에는 그런 정도는 충분히 용납이 되었다.
그런 시대였다.
겨우 국민학생밖에 안 되던 나인데 "너 노태우 손자라며?" 하는 친구들의 별 것 아닌 농담에도 "내 우자는 祐자이고 노태우는 愚자이다" 하고 이야기 하고는 했었다. 창피했다. 정말로...
주위 친척분이 묻는다 "너의 장래의 희망은 무엇이니?" 하는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별로 되고 싶은 것은 없는데 경찰하고 군인은 절대로 되고 싶지 않아요" 도대체...겨우 국민학생이고 10살도 안 된 아이들에게 어떤 꼬라지를 보여줬기에 이런 공권력에 대한 거부감을 심어준거냐?
그래 내가 기억이 나는건 80년대 중반이후이고 80년대 초는 어떴을까? 끔찍하다. 끔찍해.
내가 2학년때 대학생이 된 외삼촌은 시위에서 주도를 하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경찰서에 들어갔다 나왔다. 물론 지금은 후회를 좀 하신다. 그런 시대였다. 대학생이면 어느 정도 나가서 시위는 하던 시대...
길거리에는 써 있다. 라카로 써 있다. '80년의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아십니까? 전두환 정권 타도. 민주주의를 쟁취하자' 등등 매일 저녁에는 뉴스에서 그날 전대머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려주고 단지 머리가 조금 벗겨진게 닮았다는 이유로 연예인들이 TV에 못 나오던 그 시절.
하지만 요즈음에는 선거때만 되면 나오는 전라도 지방의 집중된 표 양상을 보면 다른 지역 사람들은 혀를 끌끌찬다. "저러니까 아직 지역주의가 타파되지 않는거지"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 그들은 아직 잊지 못할 뿐이다.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담배가게 아들이 총 맞아 죽었고 슈퍼마켓 김씨 딸이 병신이 되었는데 잊을 수가 있을까?
정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자본주의 풍요로움은 우리의 아버지 세대와 할아버지 세대들의 허리가 휘어쥠과 지금은 꼰대가 되어버린 386들의 노력이 바탕이 된 것이다. 풍요로움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충분히 되풀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보면 나하고 같은 연배 사람들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전두환때가 좋았지"
氏發 그 사람네 아버지는 전두환한테 뭘 얼마나 얻어먹었기에 그런 개젓같은 교육을 해서 그 아들을 고따구로 만들어 놓은 건지. 아니면 그 본인이 그 시대에 올림픽에 얼마나 감명을 먹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지가 그 때 얼마나 나이를 처 먹었기에 그 시절이 좋았다는 소리를 하는지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 물론 나도 그때 좋았어. 야구하고 축구하고 TV에는 메칸더V가 나와서. 나도 그 때 나이는 어렸지만 난 이런 사람하고는 이야기를 섞지 않는다. 그 사람하고는 절대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농담따먹기로 일관. 그냥 TV에 나오는 연예인 중 누가 가장 좋냐? 로 일관하지.
그런데 "박정희때가 좋았지" 하는 사람들마저 배제해버리면 우리 나라 국민의 80% 이상을 적으로 돌리는 것 같아서 그 것은 좀 참고 있다. 참아야지...
이른 바 이야기하는 복지가 잘 된 국가에는 대통령이 누가 되던지 수상이 누가 되던지 관심이 없다고들 한다. 누가 되던 자기네들 먹고 사는데는 관련이 없으니. 나도 정말 이렇게 살고 싶다. 정치에 관심도 없이 분노하지 않으면서...
하지만 한XX당의 그 망할 독재자와 육여사의 따님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대선에 출마를 해서 대통령을 하겠다는지 잘 이해가 안 되고 아직도 가끔씩 들리는 전대머리의 헛소리와 그 당당함에는 아연실색할 뿐이다.
아마 내가 선거에 참가를 한다면 그건 누군가의 당선을 막기 위해서겠지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별 거 없다. '너무 늦게 만들어졌어. 하지만 지금이라도 어디야' 미국인들은 테러에 당한 9.11에도 잊지말자고 벌써 몇 번을 영화로 만들어대는데.
영화는 중간중간 픽션이 부분과 멜로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부족하지만 그 날의 이야기들을 거대자본으로 하루하루 그려내는 재연드라마가 되었다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정말로... 정말로...
ps) 배우 이름만으로 영화를 보게되는 이름이 있다. 시나리오를 잘 보는 배우들이지. 연기도 잘 하지만 김상경, 송강호, 박해일, 배두나, (이나영)
일요일에 보고 왔다. 어떤 영화인지는 잘 모르고 <조제> <메종 드 히미코> <터치> 라는 필모의 '이누도 잇신'이라는 이름에 끌려서 별다른 정보도 없이 보러 갔는데 극장에 흠... 10대 말 20대 초 여성들이 많기에 영화를 보니까...
나오는 남자애덜이 다 아이돌 출신이더군. 흐흐 아라시인가 하는 그룹 출신이라는데 뭐 하는 그룹인지 잘 모르겠던데 작년에 왔다갔다는 것하고 쟈니스소속이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일본쪽에는 많이 약해서리 ^^
웃긴건. 다 모아놓으니까 뭐하는 그룹인지 몰랐던 애덜이 하나씩 보니까 어디선가 본 아이들 ... 흐흐
그냥 전반적인 이야기만 하자면
1963년. 도쿄 올림픽이 1년 남은 때에 (60년대라...)
가수 지망생, 소설가 지망생, 화가 지망생 그리고 만화가
이렇게 4명이 주도가 되는. 자신들이 자유라 믿는 걸 누리며. 각자가 원하는 길을 가리라 믿으며 생활하는 이야기입니다.
+ 아라시 멤버 중 한 명은 깍두기 같이 나오는 쌀집 청년 ^^
사실 60년대라는 시대는 우리나라에는 혁명과 새로운 독재의 시작이며 경제적인 성장기에 베이비붐까지 겹쳐서 굉장히 상징적인 시대인데
일본도 같은 경우에는 이른바 얘기하는 전공투라는 것이 60년대의 시류였던 것. 전공투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냐? 하고 묻는 질문에는.. 하다 못 해 하루끼라도 읽었다면 전공투라는 말에 익숙할 것이고 무라카미 류의 69도 결국은 전공투관련한 이야기이지.(제목부터 69) 이외에도 시마 시리즈도 이 무렵이 주 배경인 걸 생각할 수 있고 내가 읽었던 일본소설의 반에는 전공투가 언급이 되니 아직까지도 이런 직간접 영향을 미치는 시대라면 나름 굉장했군 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하지만 이 영화는 '청춘영화'입니다.
희망, 성장, 좌절, 연애, 분노, 그리고... 변화
어찌보면 그 격변의 시기에 이런 식으로 '띵까띵까'하는 청춘을 그린다면 '시대정신의 눈가림' , '시대의 주변인들의 일탈' , '아웃사이더들의 향연' 등등의 초난감한 비평이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현명하게도 전공투의 상징적이었던 해 1969년에서 1963년으로 옮겨서 논쟁에서 벗어날 여지도 만들어놨다.
그런데 이런 지적도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은 이 영화는 붕붕 떠 있는 꿈같은 아티스트의 길을 가려는 4명의 젊은 이를 한없이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세상에 처절하게 투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겠지만 이 영화가 그리는 건 그 길에서 한 걸음 떨어진 사람들... 오히려 그게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사는 게 더 힘든 것.
결국 영화가 평균작을 한 시점은 '그러고 이 사람들은 각자의 길에서 성공하여 긴자에서 만났습니다' 라는 식의 어설픈 성장드라마의 길을 과감히 버리고 처절하게 자신의 길로 싸움을 하는 1명, 그리고 세상에 적응을 한 나머지 이렇게 그린 게 현실적인 것...
후일담에 나오는 안경을 쓰고 같은 방에 앉아있는 에이스케의 모습이 이 영화의 압축이라고도 할 수 있을듯..
드라마로도 있지만 원작은 만화인지라 가벼운 터치로 해 놓아서 부담없이 2시간동안 웃으면서 봤다. 물론 웃으면서 뭔가 씁쓸한 것이. 별로 나이 먹지도 않았는데. '저 때가 좋은 때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예 전에 기방이, 성호, 나, 승현이 ... 이렇게 4명에 주변인들까지 자취를 했던 생각도 나고
아쉬운 것은. 청춘영화 보는 것도 즐기는 저로써는 한국에는 이런 영화에 나올만한 젊은 배우들이 별로 없다는 것. 쩝 티켓파워를 가진 가장 나이가 어린 배우가 여자는 80년생 임수정, 79년생 이나영 정도이고 남자는 82년생 정지훈? 20대 초, 중반에다가 연기도 곧잘 하는 배우들이 많은 일본하고 비교가 좀 되네 ㅠㅠ.
황색눈물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활로 나온 니노미야 카즈나리 흠... 이오지마의 편지에도 나왔다는데 앞으로 주목해야 할 배우인 것 같더군. ^^ 알아보니... 리허설 한 번도 없이 NG도 안내고 스필버그가 원츄하는 천재라 하는데 ㅎㅎ
ps) 그런데 여자 아이돌은 왜? 카시이 유우 밖에 . ㅠㅠ ps2) 중간에 술 관련해서 나오는 곡이 정말 매력적이더라. ^^
영화에 대한 첫 포스팅은 즐겁고 해피한 영화로 하고 싶었다 논란의 중심의 영화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까먹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한 번 정리 해 본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나오는 사람들의 평이 아주 장난이 아니었다. "역시 예술영화는." "난 중간에 나오려고 했다" "결말이 뭐야?" "전도연만 잘하더라"
어 참... 의아하더군. 조금 이해할 수 없는 면도 있었고. 그래서 집에서 이른바 전문가들의 평을 봤다. 즐겨보는 FILM 2.0 에 보니 UP/DOWN에서 전부 UP으로 해 놓으셨더군... "최고다 최고" "영화에서 신을 논한다" "작가 송강호" "이 영화는 윤리적인가?"
도대체 이 간극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미약하지만 내가 편견어린 시선으로 이 영화를 한 번 보겠다.
아래 버튼 누르면 나와욤(스포일러 있어요)
1. 이창동의 첫 번째 멜로 영화?
남편을 잃은 신애는 아들 준과 함께 남편이 '고향 밀양에 가서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그 도시에 내려간다. 하지만 차는 바로 고장이 났고 어딘지 위치도 모르겠는 그녀는 결국 주위 운전자의 도움으로 카센터를 부르고 카센터 주인의 차를 얻어타고 밀양에 온다. "밀양은 어떤 도시인가요?" "밀양이 어떤 뜻인지 아세요?" "경기가 엉망이고 부산과 가까워 말씨도 부산말씨고, 뭐 인구는 마이 줄었고" "사람 사는데 다 똑같은 거 아닙니꺼?"
우리는 여기서부터 이 영화가 단순한 멜로드라마가 아님을 살짝 예상할 수 있다. 대화에 뭔가 엇갈림이 있는 여 와 남은 멜로드라마 라인을 형성하기 쉽지가 않다. 차라리 부딪치면 부딪치는 것이고 잘 맞으면 잘 맞는 것이지 이렇게 살짝 살짝 나가는 대화는 두 사람의 간극을 드러내는데 오히려 효과적이다. 감독 이창동(또는 작가 이창동)은 여기서 선언을 한다.
니들 낚인거다...
2. 거짓과 진실.
신애는 뭔가가 껄끄럽기는 하지만 종찬의 도움으로 집을 얻고 피아노학원을 차리고 옆 가게의 주인에게 인테리어 훈수도 두고 '원장님같이 불행하신 분이 하느님을 믿어야~' 등등 하는 약국아주머니도 쌩까고 아들의 유치원 원장에게 좋은 땅 있는지 물어보고 유치원 어머니들과의 회식, 그리고 주위의 아주머니들과의 회식 등등 굉장히 바쁘게 살아간다. 그런 그녀 곁에 종찬은 계속 얼쩡얼쩡(!)거린다. 심지어 그녀의 동생에게 창피를 한 번 당하면서도...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과 진실 게임을 한다. 신애와 준의 거짓/진실 게임: 코골기, 숨기, 나가기 싫어하기, 울기 이런 식인 것이지.
사실 여기서도 한 번 낚인 건 아들이 유괴된다는 정보는 반전이 있는 영화들에 너무 익숙해진 거의 대부분의 관객이 알고 갔을 것이고
영화 시작한지 20분도 채 안되서 사라졌다가 사실은 그게 아니고 숨은 것이었다를 아는 순간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이 시점까지 우리가 주목을 하는 내용은 '신애'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가 하는 것이다. 그녀가 음대를 나왔다는 것으로 중산층 이상의 집안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남편은 사실 바람을 피웠지만 그녀는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아. 그녀의 남편은 사업을 했다는 것. 그리고 땅을 알아보는 그녀.
이 무렵까지 영화는 줄거리 상으로는 '신애'가 불쌍한 여자이지만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녀의 허위의식을 까발리는 것. 실제로 그녀가 자기의 이야기를 은근슬쩍 흘리는 것은 '여기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그녀의 말에 반대로 남편이 죽고나서 그녀가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하였는지 보여준다.
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이냐?
3. Sad But true.
주위 아주머니들하고 회식을 하고 들어간 집에 아들은 없고 전화가 걸려온다. 신애는 아들 목소리라도 들려주길 원하지만 어불성설. 결국 거액의 돈을 인출하여 외진 곳의 쓰레기통에 갔다 놓지만 걸려온 전화는 그녀의 재산을 우리에게 다 까발린다. 그리고 피아노 학원 앞에서 그녀의 집을 울면서 바라보는 유치원 원장 딸. 발견된 아들의 시체 ...시댁 식구들이 던지는 오열과 매몰찬 한 마디 "남편도 죽이고 자식도 죽이고" "너는 눈물도 없냐?" 더군다나 범인은 유치원원장.
자! 우리의 반전에 익숙하신 관객들이 원하는 내용이 나왔다. 잠시동안 별 일 없이 사는 듯한 그녀에게서 결국은 더 큰 산이 다가온다. 그 녀의 유일한 피난처인 아들의 죽음. 더군다나 아들의 죽음은 그녀가 관심을 보인 '땅'을 중계해준 아저씨다. 결국 아들의 죽음에 그녀가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시점에 감독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당신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이냐?
4. 하느님의 구원
약국 집사의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는 모든게 뜻이 있다'라는 말을 거부를 한 그녀지만 결국 약국집사가 추천해준 부흥회에 나가고 거기서 그동안의 쌓였던 울음이 터져나온다. 그리고 그 녀는 그 동안의 죄를 속죄하듯이 교회의 모든 행사에 열심으로 산다. 그리고 종찬은 여전히 얼쩡거린다. 그녀는 자신의 원수를 용서를 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아마도 여기서부터 기독교인들은 불편해지기 시작했을 것 같다. 아들도 죽고 남편도 죽은 여자에게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는 전부 뜻이 있다니' 사실 이건 굉장히 부적절한 답이 아닐 수가 없다. 사회에서 정답은 '하늘나라'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아닐까? 하지만 이건 기독교라는 종교로 봤을 때는 정답아니다. 약국집사가 한 말의 숨은 의미는 2명의 사람을 하느님에게로 돌려보내고 결국 신애에게 믿음을 주려는 것...
하지만 뭔가 아픈 속을 긁어대는 듯한 이 부분은 굉장히 아프다... 정말로... 오히려 이런 기독교에 대한 묘사는 정말로 사실적인지라 저런 부적절한 상황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기독교인들을 조금씩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재미가 난 것은 여기서 묘사하는 종교에 대한 묘사는 정말 객관적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일부 희극영화들처럼 희화화하지도 않고 실제 목사들이나 종교인들이 연기를 한 듯한 디테일한 묘사는 오히려 픽션인 영화에서 더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이 된다.
부흥회 이 후 종교를 믿고 나서의 이야기를 하는 신애의 모습은 기뻐보이지만 굉장히 공허해 보인다. 이게 가능하냐고 묻겠지만 전도연은 이 연기를 해 낸다. 더군다나 교도소까지 가겠다는 신애가 데려다 주겠다는 종찬을 '자기 혼자 가는 것이 아니다' 며 타박하는 신애는 일견 보기에는 연애를 시작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니 직접 얘기를 하지. 하느님과 연애를 하는 기분이라고...
5. 끝난 줄 알았지?
하지만 신애가 큰 맘 먹고 용서를 하러간 교도소에서 신수가 훤하던(종찬 표현. 맞나?) 그 남자는 자신은 주님의 구원을 받았고 신애씨도 그래서 다행이다라고 한다. 돌아오는 길 신애는 악에 받친 표정으로 꽃을 버리고 쓰러진다.
굉장히 짧은 부분이지만 이야기가 길어지고 어찌보면 논란이 많은 부분인지라 짚고 넘어가야서.
신애가 교도소에 간 이유는 다름 아닌 '용서'를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잘못'을 빌며 '용서'를 구하지 않고 오히려 신애가 신을 만난 것을 축복한다.
What the hell?
현대 사회의 기독교는 신 앞에 나가서 용서를 구하면 그것을 신은 들어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어떻게 보면 함무라비 법전이 있던 때처럼 눈에는 눈 이라는 사건의 당사자 둘이서 합의보는 사회가 실제적으로 보이고 금전이라던지 법의 테두리에서는 그렇게 움직이지만
실제로 '용서' '잘못' 등등의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서는 둘이서 합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종교인들의 경우에는 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천주교에서는 이것을 '고백성사' 라는 이름으로 좀 더 의식화해 놓았는데 인간이 신의 대리자인 '신부'에게 자신을 '죄' 를 고백하고 사해주기를 요청하면 신의 대리자인 '신부'는 신이 사했음을 선포하고 다시는 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을 이야기 한다.
이런 장면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작년에 나온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라는 영화인데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이런 상황을 수습을 한 것이 '밀양'에서와는 다르게 범죄자가 잘못을 구하고 피해자는 난 이미 용서를 했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종교 안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주도 있지.
하지만 이 영화 밀양에서는 좀 더 크리티컬하게 '그럼 가해자가 용서도 안 빌면 어쩔 건데?" 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정말 걸작이다... 걸작...
6. Rage against the God
신애는 이 후 교회에는 나가지 않는다. 지나가면서 목격한 범죄자의 딸이 구타당하는 곳에서 외면하고 CD가게에서는 절도행위를 하고 그 CD를 부흥회에서 틀고 ( 나오는 음악은 거짓말이야~) 전화가 오는 듯한 소리를 듣고 나와서 수화기를 들면 범죄자의 목소리도 들려 종찬과 분위기 쇄신상 밥 같이 먹기로 하고 무시... 자신을 교회로 인도한 약국집사의 남편을 유혹하지만 실패.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한다는 집에 던지는 작은 돌... 그리고 자신을 어쩌지 못하는 종찬을 희롱하고 결국은 칼로 긋고 바깥으로 나와서 도움을 요청한다.
사실 이 부분이 이 영화의 제일 중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일반적인 영화관객들과 평론가들의 의견이 갈라지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고.
1. 관객을 가정해서 그 사고의 흐름을 쫓아 가보면
멜로 라인 -> 시련이겨내는 주인공 -> 또 다른 시련 -> 종교의 힘으로 이김 -> 다시 시련
이렇게 된다치면 여기서의 결론은 다시 이겨내는 것으로 가면서 신애와 종찬의 러브라인이 형성이 되면서 하는 것이 이른 바 얘기하는 해피엔딩으로 가는 길이겠지만
감독이 택한 길은
2. 새로운 곳으로 쫓아옴 -> 거짓된 이야기 -> 신의 시험 -> 일시적 평안 -> 용서를 했다는 신
이고... 이 다음에 나오는 내용들은 신에 대한 반항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여기서 1.의 흐름을 쫓아온 비종교인 관객들이면. '어 이거 뭐야? 왜 저렇게 힘들게 끝까지 가나?' (정말 잔인하도록 끝까지 간다)
1. 에서 이제 2.였음을 깨달은 종교인 관객들은 '주인공님하~ 어찌 주님에게 반항하남여?' 이렇게 되는 것이지.
여기서 비종교인들이나 종교인들이나 '불편한 영화'가 되는 것이다. 비종교인들이 원하는 성장하는 주인공도 아닌 것이고 종교인들이 원하는 주님에게 귀의하는 모습도 아니고...
하지만 여기서 감독은 더 멀리 나아간 것은 실제로 신애가 하는 행동들이라는 것이 정말로 '종교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종교에 대한 존재를 몰랐다면 그녀가 하는 행동이라는 것은 범죄자딸에 대한 복수나 범죄자에 대한 복수 로 가겠지.
하지만 그녀는 심지어 원장딸이 맞고 있는 장면에서도 차를 돌려서 가려고 하는데다가. 현실에 대해 복수를 하는 것도 결국은 신과 관련되어 있는 내용들에게 위해를 끼쳐려 한다. 이런 면들은 약국남자를 꼬셔서 섹스를 하려는 장면에서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아래에 누운 신애는 하늘을 보고 도발을 한다 '잘 보여?'
그리고 그녀가 결국 택한 길은 신에 대한 제일 큰 반항이자 '죄'라고 하는 자살기도이지만 그녀는... 그 상황에서 결국은 선택을 하지 못한다.
Acute Stress Disorder(급성스트레스장애)
A 1. 자신, 타인의 죽음, 심각한 신체손상 또는 이에 대한 위협이 상황의 경험/목격/직면 2. 이로 인한 극심한 공포, 무력감, 전율 B 다음 중 세가지 이상의 해리성 증상이 있다 1. 마비감 2. 멍한 느낌 3. 비현실감 4. 이인증 5. 기억상실 C 재경험: 사건에 대한 반복적, 침습적인 괴로운 회상, 악몽, 경험 되살아남, 괴로워함 D 회피: 관련된 생각, 느낌, 대화, 장소, 활동, 사람 회피, 외상경험 망각, 흥미 감소, 고립 E 과각성: 수면유지곤란, 자극과민, 분노폭발, 집중력 감퇴, 과도한 경계심, 놀람 F 주요 영역 기능 장애
여기서 흥미로웠던 것 중에 하나가 신애가 하는 행동들이 정신과에서 다루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또는 급성 스트레스장애에서 보이는 양상을 보여주는 데다가 종찬과 약국남자에게 보이는 정신과적 이상행동들. 사실 잘 표현하기 힘든 부분인데 역시 이창동감독은 먹물출신에 작가출신이라 그런가 디테일한 면까지 잘 표현이 되었더군. 정신과 의사들이 여기에 흥미를 많이 보일 듯 싶던데.
7. 복잡해진 마무리
병원에서 퇴원을 하게된 신애에게 종찬은 옷도 사오고 꽃도 내민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처음으로 뭘 하고 싶냐고 하는데 신애는 머리를 자르고 싶다고 하고 그가 데리고 간 곳에는 원장의 딸이 있었다. 신애는 머리를 자르며 이 것 저 것 묻다가 결국 박차고 나오고 결국 집에서 혼자 머리를 자르려는데 종찬이 와서 도와주고 그리고 그 집에 작은 햇볕이 든다.
엔딩에 대해서 나의 의견은 결론이 안 났다. 여기서 굉장히 힘들어진게 도대체 종찬이 왜 신애를 그 여자애네 미장원에 데려 갔나?
처음에는 이거를 굉장한 우연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그 후에 신애가 자신의 모습을 보다가 종찬이 거울을 비춰주면서 머리를 자르는 장면에서 옆 쪽으로 밀양(Secret sunshine)이 비치면서 둘 사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로 생각을 했는데
오늘 리뷰를 쓰다가 든 생각은... 혹시 종찬이라는 존재 자체가 애초에 '신'이라는 존재를 염두에 두고 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 어디냐 하면 신애를 그 아이가 있는 미장원에 데려간 것은 바로 종찬. 그리고 그 아이에게 머리를 반은 자른 신애. 다시 한 번 종찬에게 '왜 나를 거기로 데려갔느냐?' 반항하는 신애.
종찬은 다시 한 번 신애에게 '용서'를 할 기회를 준 것이다
하지만 다시 집에 들어와서 혼자 머리를 자르다가 다시 집에 와서 은근슬쩍 다가와서 종찬은 신애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게 거울을 들고 거기다가 관객들도 신애의 얼굴을 보면서(우리를 비추는듯 ㅠㅠ) 머리를 자를 수 있게 도와주고 그 옆에는 비밀스러운 햇빛이 비치는 것...
만약 이렇게 마무리가 된다면 신애의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뭔가 해주려하지만 어정쩡한 그런 모습이 우리의 옆에 있는 신에 대한 비유라 생각하니까...
이건 종교영화네? 하는 생각이 들더라 허허...
8. 그래서 어쩌라고?
이창동감독님하 짱먹으셈
굉장히 무책임하게 들리겠지만 위에 처음에 써놓은 게 맞는지 아래 쪽이 맞는지. 하지만 결국은 든 생각은
멜로 맞네... 쩝. 인간과의 멜로이든 신과의 멜로이든...
핸드헬드로 거의 다 찍은데다가 연기 비 전문 배우가 나와서 연기를 한데다가 반면에 전도연과 송강호라는 이른 바 연기 No1. 들만 모아놓아서 영화 보는 내내 어지러웠는데 결국 결론도 어지럽게 나는구만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