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8일 11시 20분이었다.

1년도 더 된 일을 몇시인지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날 나는 그녀와 헤어지기로 맘을 먹었기때문이다.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은 후 1년이 지나서야 오늘 헤어지기로 한건.

2013년 4월 18일에 벌어졌던 일이 헤어지는 이유라 한다면

정규분포 안에 드는 보통 사람들에겐 이해하기 힘들 일일 수 있기때문이다.

'성격차이야'라는 말로 대충 메꿀 수 있겠지만.

나는 굉장히 정확한 사람이기에 그런건 용납하기 힘들지.

그래서 나는 

2013년 4월 18일 이후로 그녀와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들을 적립하기로 하였고.

그렇게 10개가 모이면 그녀와 헤어지기로 맘을 먹었다.

짜장면집 쿠폰도 20개, 커피샵 도장도 20개가 대세인 시대에

아니 10개 무슨 말이요라 할 수 있겠지만.

글쎄. 5개가 아닌 것만으로도 나는 그녀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럼 다시 2013년 4월 18일로 돌아가보자.

그녀와 만나서 사귀기로한건 2012년 7월 27일 오후 11시이었으니.

사귄지 약 9개월이 되었을 시점이었다.

전날 우리는 이태원의 모처에서(장소를 밝히지는 않겠다. 나는 그 곳을 싫어한다)

기네스 한잔과 라프로익 두잔, 진토닉을 두잔 마시고.

그녀를 데려다 주는 길에 다음날 약속을 잡았었다.

술을 조금 마셔서인지 그녀는 다음날 해장을 하겠다고 하였고.

역시 해장에는 국물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던 우리는.

늘 먹던 고깃국물이 아닌 냉면을 먹기로 했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였을까..


"K씨, 우리 내일 냉면 먹어요."

"오 좋죠. 냉면. 어디서 먹을까요?"


만난지 9개월이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냉면을 먹은 적이 없었다.

무엇을 먹을지 나는 늘 그녀의 의견에 따랐기때문에.

냉면은 겨울에 먹는것이라는 상식에 반해 겨울에는 냉면을 한번도 먹을 수 없었다.

그녀는 차가운 음식은 여름, 뜨거운 음식은 겨울이라는 이야기를 매 식사를 할때마다 했었다.

아니 그건 당신의 상식이고, 사실은 아니다라고 고쳐줬어야 했을까?

하지만 나는 이상한 의견을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주장하는 그녀가 귀여웠을뿐이다.


"냉면하면 칡냉면이죠. 매운 양념 비빔냉면도 괜찮고요"

"비빔냉면이요? 그 단걸 먹자는 말인가요?"

"아! K씨는 냉면은 단 걸 싫어하시는군요. 그럼 어디서 먹을까요?"

"우리 내일 점심쯤 만날거니까, 조금 일찍 만나서 을밀대 문 열기 전에 만나죠. 10시 35분에 대흥역에서 만나요."

"을밀대요? 거기가 어디에요? 무슨 냉면 파는 곳이죠?"

"평양냉면이요. 을밀대 모르시는구나"

"예. 아직 가본 적이 없네요. 내일 한 번 가보죠. 평양냉면이라..."

"맛있어요. 그럼 내일 만나요"


그녀가 먹자고 하는 것에 내가 첫번째로 브레이크를 건 날이었다.

나는 그녀가 먹자고 했던 매운 양념의 칡냉면을 매우 매우 싫어한다.

매운양념의 칡냉면을 돈을 주고 사먹느니 집에서 비빔면을 먹는것이 나을 것이다.

비빔면에 오이를 얹는 것에 나만의 비법이 있는데 그렇게 먹으면 밖에서 사먹는 비빔냉면따위야...

더군다나 그녀는 평양냉면이라... 하면서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평양냉면을 먹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냉면을 먹자고 한건가?


사실 이때 나는 생각을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생각을 하다보면 뫼비우스의 띠의 시작점에 올라서 무한반복을 하는 버릇이 다시 나왔다.

뫼비우스의 띠에는 시작점이 없나? 모르겠다. 없을리가 없지 않나?


그리고 2013년 4월 18일.

10시 35분에 만나기로 했으니 나는 10시 28분쯤 도착하기로 했다.

'11시가 오픈시간인 것 같은데 왜 그 전에 만나죠?'라고 그녀의 카톡이 왔지만.

나는 무시하기로 했다.

오픈시간 전에 가서 줄을 서지 않고 유유히 좋아하는 테이블에 앉아서.

남들이 밖에서 줄서는 것을 구경하며 마시는 면수의 맛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이런걸 설명해줘봤자 사람들이 '??'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많이 보았기에.


그녀는 10시 38분에 나타났다.

9개월간의 관찰기간을 놓고 보면 그녀는 평균 5분정도를 늦는 것 같다.

10분정도 늦었다면 지금까지 그녀를 만나고 있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정확한 것이 좋다.

조금 늦었다. 이 시간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못 앉는데...


"K씨 일찍 왔나 보네요. 날 더운데 미안해요"

"아니에요. 이제 막 왔네요"

"그럼 냉면집이 어디죠?"

"예 저를 따라 오세요"


조금 늦기는 했지만. 또 어쨌든 흥분이 됐다.

9개월 동안 그녀가 먹고 싶은 것을 쫓아 다녔고.

그녀가 이끄는 곳에 가서 먹었던 내가.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곳에 그녀를 데리고 간다니...


글쎄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지만.

2013년의 4월은 매우 무더웠다. 

103년만의 어찌고 저찌고를 매일 듣고 있었다.

하긴 매년 XX년 만의 OO는 매년 듣고 있는 것이긴 하네.

그런걸 보면 우리가 매년 새로운 해를 사는건 맞는걸까? 

아니 그냥 똑같은 해를 사는데 숫자만 바뀌는거 아니야?


"K씨 무슨 생각하세요?"

"아.. 아니에요. 길이 조금 멀죠?"

"예. 그렇긴 하네요"


대흥역에서 을밀대까지는 내걸음으로는 약 8분정도 걸린다.

하지만 그녀는 발이 느린편이다. 어제 잠깐 계산을 해보니 10분이면 갈 거리인데...

그렇게 계산을 해도 이미 도착을 했어야 할 시간인데...

그녀는 오늘따라 발걸음이 느리네...

이래서는 내 자리에 못 앉는데...........


"아 다왔다. 저기에요!"

"아 그래요? 맛있게 생긴 집이네요"

"왜요?"

"간판에 저 이름 한문으로 써있는거봐요. 오래된 집인 것 같은데?"


그녀는 맛집을 갈때 밖의 외양을 보면서 늘 맛있게 생긴 집이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맛있게 생긴 집이네요. 왜요? 허름하니까요.

맛있게 생긴 집이네요. 왜요? 간판이 새거잖아요. 이쁘고. 간판에까지 정성을 쓸 정도면...

맛있게 생긴 집이네요. 왜요? 큰길가잖아요?

맛있게 생긴 집이에요. 왜요? 이렇게 구석진 곳에 이런 식당이 있으니 얼마나 잘되면 그러겠어요?


기어코 지난 주에는 이런 말까지 했다.

맛있게 생긴 집이에요. 왜요? 밖에 개 봐요. 아이구 이뻐. 남긴 음식 먹고 저렇게 이쁠정도면.


글쎄. 엄청난 비논리이고. 사실 나로써는 절대 이해하고 싶지도, 입밖으로 내뱉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왜요라고 묻고 나면

맛집을 보며 그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입맛을 다시며 하는 이 비논리적인 문장은.

그 눈빛과 표정으로 비논리가 절대적 진리로 변하는 힘이 있었다.

귀엽다. 그래서 나는 꼭 물어본다. "왜요?"


느릿느릿 결국 오픈 시간 12분전에 도착을 했다.

가게 아주머니와 눈인사를 나누고 들어간 순간.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다시 나가야 하나하고 생각을 했다.

늘 내가 앉던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있다.

어제 외박을 했는지 머리는 떡이 져서, 신발은 벗고 있고, 핸드폰으로 뭔가 게임을 하고 있다.

이런 제길. 애니팡이잖아...

저 놈이 나가면 내가 저기 앉을까? 

하지만 저 놈이 앉은 자리에는 앉고 싶지 않다. 더럽고 몰상식한 놈. 

내가 늘 앉는 자리는 제일 끝에 있어서 사람들이 냉면을 다 먹고 육수를 마시는 그 표정을 볼 수가 있어서 좋은데..

하아... 어쩌지????


자리에 앉지 못하고 쭈뼛거리던 나를 그녀가 손을 잡고 이끈다.


"저기 자리 있네요. 가서 앉아요."


그녀가 이끄는 손에 어쩔 수 없이 앉은 자리는.

마침 내 자리가 딱 보이는. 저 놈이 닥터마틴을 벗은 맨발이 보이는 딱 그자리였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그녀와 이렇게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는 그 때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2013년 4월 18일 을밀대 오픈 10분전인 10시 50분...


"K씨 무슨 생각 하세요?"

"아니에요~ 별 생각 안했어요"


그녀는 내 생각이 뫼비우스의 띠에 올라가있으면 그걸 또 어떻게 그렇게 알아서 잘라준다.

그게 또 좋진 않지만. 그게 또 나쁘지 않다.


오픈시간이 되자. 아주머니들이 주문을 받는다.


"뭐 드릴까요?"

"예~ K씨는 물냉면 드신다고 했죠? 저는 비빔냉면이요."


?????

을밀대에서 비빔냉면 ????

????????


아주머니는 주문을 받고 이미 가신 후였고.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라고 생각을 했다...

내가 그녀에게 맛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을밀대의 물냉면이었지 비빔냉면은 아니었기에.

하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을 어쩌겠나.

커뮤니케이션의 부재가 이런 일을 가져왔다니...


"물냉면이 맛있지. 비빔냉면은 잘 모르겠네요. 난 을밀대에서 비빔냉면 시킨 사람 처음 봤네요."

"아 그래요? ㅎㅎ 전 평양냉면 물냉면은 먹어본 적이 없어서요."


어찌되었건 주문은 갔고.

아주머니들이 면수와 반찬들 그리고 가위를 가져다 주셨다.

'가위 필요없는데...'라고 생각하며

면수를 쓰읍하면서 마시고 있을때 딱 보이는 애니팡하는 백수놈.

그녀에게 자리를 바꿔달라고 할수도 없는 노릇이고 좀 난감했다.


맘을 다그쳐야 할 타이밍이다.

그녀가 선택한 식당이 아닌 내가 선택한 식당.

비록 시간이 늦어 내 자리에는 못 앉고.

그녀에게 맛보게 하고 싶었던 물냉면은 못 먹겠지만.

망칠 수는 없다.


"음식 나왔습니다"


찰칵~~~~


아주머니가 내 물냉면을 내려놓고

어...하기도 전에.

그녀가 내 냉면을 가위로 촥촥 자르고.

자기 면을 촥촥 잘랐다....



이런....

이런.........


"면을 가위로 자르시면 어떻게 해요!"

"예?"

"면에 쇠붙이로 된 가위가 닿으면 면의 맛이 변하는거 모르세요?"

"예? 냉면 먹는데 몇 분이나 걸린다고 맛이 변해요?"

"변한다고요. 변해요. 쇠맛이 난다고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하지만.. 

가위소리가 나자 옆자리의 가족 중에 아버지가 조그맣게 들리는 목소리로 

'냉면은 가위로 잘라먹는거 아냐'라고 딸에게 설명을 해주던 모습

가위소리가 촥촥 날때 애니팡하던 백수놈이 '쯧쯧'하면서 '냉면 먹을 줄 모르네'하며 쳐다보는 그 눈빛을.

아니 저런 떡진 머리한 루저한테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한다니 참을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건 먹어야 하지 않을까?

가위로 자른 냉면의 맛도 언젠가 한 번 맛봐야 한다면 오늘같은 날에...


"아주머니! 여기 주문 좀 받아주세요!"

"예? 뭐 녹두전이나 이런거 필요하세요?"

"아니요. 이 냉면 그냥 가져가 주시고요. 한 그릇 새로 가져다 주세요?"

"예? 음식에 문제가 있나요?"

"아니요. 문제 없고요. 저희 그냥 한그릇 더 시킬게요!"


어느새 나는 새 냉면을 시켰고.

그녀가 가위로 잘라준 냉면을 돌려보냈다.

그녀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귀엽지 않다. 그렇다고 지금 "왜요?"라고 물어볼 수는 없다. 

나는 쇠맛이 느껴지는 냉면을 먹고 이미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K씨 왜 그러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이제 되었어요. 새 냉면 먹을게요."

"아니 그 쇠맛이 정말로 나나요? 전 잘 모르겠는데"

"글쎄요. 비빔냉면이야 쇠맛이 안나겠죠. 그렇게 단데..."


그녀는 내 말에 더 이상 답을 하지 않았고.

나는 새로 나온 냉면을 내가 먹는 방법으로 맛있게 먹었다.

매우 덥다지만 아직 여름은 아니니까, 여름의 막하는 냉면보다는 나았다.

그래도 겨울의 맛은 아니지만 말이지.



각자의 냉면을 먹고 우리는 나왔다.


"우리 이제 상수쪽으로 옮겨서 커피나 마시죠?"

"K씨, 저는 피곤해서 이만 들어갈게요."

"예? 아직 12시도 안되었는데"

"오늘은 좀 들어가야할 것 같아요"

"엇.. 그럼 들어가세요."


그렇게 우리는 냉면집에서 나와 대흥역까지 갔고.

나는 상수역쪽으로, 그녀는 삼각지쪽으로 반대방향으로 지하철을 타고 갔다.

상수역에서 커피를 마시며 생각 했다.


평균 5분씩 그녀는 늘 늦었고, 그로 인해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못 앉았다.

그로 인해 내 자리에는 그 애니팡하는 놈이 앉았다.

내가 맛보게 해주려했던 평양냉면 대신 비빔냉면을 시켰다.


다 좋다고 했다. 여기까진 괜찮았지만. 


내 냉면을 허락도 받지 않고 가위로 자른건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두에게 자신만의 음식 먹는 방법이 있듯이.

탕수육 부어먹는 사람도 있고 찍어 먹는 사람도 있으니, 전부 부어버리면 안되는 것을.

그런 것을 남이 먹을 음식에 함부로 하는 사람.


그런 여자와 더이상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헤어져야겠다.

오늘을 D-day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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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냉면 먹다가 앞자리의 남여가 하는 이야기 듣고 삘받아 소설 한 편 작성해봤습니다.

제 이야기 아닙니다~  











Posted by 빨간까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