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0일 새벽 1시 50분.

내가 그녀와 헤어지려 하는 두번째 이유의 날.

그녀와 헤어지기로 맘을 먹은 이후 한달이 흘러가는동안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4월 18일 을밀대에서의 나의 행동에 서운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녀가 이야기한 후에 생각해보니,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그렇게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하다니.

내가 참 몰상식한 행동을 했군. 이라 생각이 들었고.

어찌되었고 그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해 그녀에게 사과를 하였다.

"미안해요. 내가 참 예의가 없었네요"

물론 나는 내가 생각한, 그녀와 헤어지기로 했다는,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를 굳이 꺼낼 필요없이 우리 사이는 너무 좋았고 안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듯이 행동을 하였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생각의 흐름을 정확히 짚어내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은 없었다. 나는 늘 설명을 해야했기때문이다.


"오빠 삐졌어요?" "아니 삐졌다니 무슨 소리야" "삐졌잖아요. 아니면 왜 그래요?" "안 삐졌어"

삐졌다는 말은 참 내가 싫어하는 말이었다. 

내가 기분이 안 좋고, 내가 화가 났고, 내가 울고 싶고, 내가 우울하고, 내가 야한 생각을 하고

어찌되었건 내가 말을 하고 있지 않을때 그녀들은 전부 내게 '삐졌냐'고 이야기 했다.

나는 삐진적이 없다. 

나는 화가 났을 뿐이고, 울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삐졌냐는 말을 그녀들이 내뱉는 순간, 나는 삐진 인간이 되고, 삐지게 되었다.


그녀는 나에게 삐졌냐고 한 적이 없었다.

그녀와 있으면 나는 삐질 이유가 없었다.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하는 선택이 늘 나의 맘에 든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 그녀의 취향은 참으로 고상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랐다.

커피 한잔값을 아껴 지구 반대쪽에 보내는 ... 이라는 가요의 한 구절에 뭔가 와닿아

세상을 바르게 살기로 했다는 그녀는

어찌보면 나의 평소 생각과는 전혀 반대 방향이었지만.

재잘거리며 자신의 선택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그녀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 즐거움만으로 나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선택들에도 내게 참 괴로운 순간들은 있었다.

괴로운 시간 중에도 가장 자주 오는 괴로운 시간은 바로 '야구 직관'이었다.

그녀는 LG의 골수팬이었다. 골수팬. 

김용수 선발 시절부터의 팬.

두산의 팬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LG를 응원했다는 그녀는 2주일에 한번은 야구장을 갔다.

문제는 내가 LG와는 라이벌이었던 기아의 팬이라는 것.

아니 정확히는 90년대 LG와의 라이벌이었던 해태의 팬이었던... 

그녀와는 달리 나는 아버지가 해태팬이어서 그대로 팬이 된 경우였다.

1년에 한,두번은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서 광주까지 응원을 가고는 했다.

아버지는 그날 고향 친구들을 만나서 야구장에서 술을 드시면서 

"너는 고향을 잊어서는 안된다. 네가 태어나긴 서울이지만 고향은 전주야."

아버지가 술을 덜 드시면 광주에서 야구 끝나면 전주까지 올라가서 고향을 둘러보는 것이 1년의 한번의 의식이었는데.

나는 그렇게 쫓아가는 것이 매우 좋았다.

시골 어르신들은 내가 그 집에 가서 책을 읽고 있으면 그렇게 좋아하시며 용돈을 왕창 주고는 하셨다.

"역시 서울애는 달라. K 쟤가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면서요. 아비는 돈없어 대학을 못갔는데 쟤는 잘되겠지"


그녀가 처음 야구장을 가자고 했을때, 나는 차마 내가 기아팬임을 밝힐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날은 기아와의 경기였기때문이다.

그녀와 만난지 이제 막 1달무렵 되었을때, 그녀는 올해의 LG는 다르다며 흥분해 있었다.

물론 나는 매년 기아도 다르고 LG도 다르지만 성적은 똑같아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야구는 잘 모른다고 하였다.

그녀는 무려 이대X 선수의 팬이었다.

발은 빠른 그 선수는 발만 빠른 것으로 놀림을 받는 선수였다.

그녀가 부르던 '슈퍼소닉 이대X 안타'라는 응원가는 들을 수록 드는 생각이

차라리 '슈퍼소닉 이대X 도루'라고 하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LG의 그 하고 많은 선수 중에 왜 하필 쟤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선수가 뭐가 좋아요?"

"잘생겼잖아요. 몸도 날씬하니 좋고"


나는 저게 야구선수의 몸이냐? 모델의 몸 아니냐?라고 코웃음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내년 끝나면 FA라는데 제발 우리팀에 남았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바램과 달리 많은 LG팬들은 그가 남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요! 남았으면 좋겠네요. FA는 뭐의 약자에요? 제가 아는 FA는 축구협회인데, Football Association."


아차... 나도 모르게 축구 이야기가 나왔다.

난 축구를 좋아한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내게 축구선수들의 그 자유로운 움직임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워낙 어렸을 적부터 축구를 보다보니, 아무래도 K리그는 B급 선수들이 뛰는 리그라 생각이 되었고.

고등학교때 나의 눈을 사로잡은건 리버풀, 그리고 이후에는 앙리 이후에는 아스날이었다.


"아 맞다 K씨 축구 좋아한다고 하셨지. 아서날? 아스날?"

"아스날이요. Arsenal. 아.스.날."


아차... 날카로워졌다. 이럼 안되는데.


"아스날은 영국의 전통의 축구 명가로 우승을 많이 한 팀 중에 하나로

프랑스인 출신 감독인 벵거가 부임한 이래 황금기를 맞아 

리그 우승, FA 우승 및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거뒀다.

유럽의 강호들이 벌이는 챔피언스 리그에 매년 진출하고 있지만.

근래에는 성적이 좋지 않아 매년 살얼음판을 걷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7번정도 한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축구가 몇명이서 하는 경기인지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저번에는 축구에서 골키퍼가 야구의 지명타자랑 비슷한 거 아니냐고 물어 나를 한번 큰 혼돈에 빠지게 만든 적이 있었다.

그녀의 질문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면이 있어서 답할때면 늘 진땀을 빼고는 했다.


"아스날 잘하나 봐요. 4등이면 준플레이오프죠?"


그녀의 질문에 나는 축구리그에서 플레이오프를 하는 나라도 있지만 영국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2부리그에서는 플레이오프를 해서 승격이 되기도 한다. 라고

그녀와 야구장을 갔던 첫날에 설명을 했었다.


괴로웠다.


그녀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말을 좀 하고 있으면.


슈퍼소닉 이대X 안타를 외치고는 했다.

타석에는 이병규가 나와있었는데...


귀여웠다.

그녀의 일방적 사랑이 지금은 그에게 가 있지만 언젠가는 내게 향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그녀와 한달에 1~2회의 야구장 데이트는 이어졌다.

다행히 그녀는 더이상 나를 기아와의 경기에는 데리고 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한번 더 갔으면 사실 나는 기아팬이라 커밍아웃을 할 뻔 했으니까.



문제는..

그녀가 축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아스날'이라는 구단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된 이후 

그녀는 인터넷으로, 아니 정확히는 네이버로 '아스날'을 검색을 해서

나오는 글들을 읽고 있었다.

정확한 정보는 별로 없는 글들을 그녀는 읽고, 내게 이야기 해 주었다.


"아스날에 젠킨슨이라는 선수가 그렇게 잘한다면서요?"

"아스날 벵거 감독님은 피레스라는 선수를 싫어한다던데요?"


축구 경기를 보지 않고, 정보만을 습득해서 이야기하는 그녀의 질문들은.

나로 하여금 커피숍에서 물을 3~4잔씩 리필해가면서 설명을 해야할 정도로

얼토당토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잘 못 된 정보를 입수하는 것일까.

나는 내가 보고 있는 영국의 정론 잡지들을 그녀에게 읽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에서도 슈퍼소닉 이대X 안타만 외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나의 LG'라는 표현과 달리 '아스날'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긴장이 되었다.

그녀가 아스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아스날에 대해 설명을 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2013년 5월 20일 새벽 1시 50분.

카톡이 왔다.

"축하해요 K씨. 아스날이 뉴캐슬을 이겼던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차피 이길 경기여서"

"아 그래요. 뉴캐슬 약한 팀이구나."

"아니 그건 아니고요."

"아 그럼 뉴캐슬은 강팀이에요?"


아스날이 뉴캐슬을 맞아 시즌 최종전을 하고 있던 그 시간에

나는 집에서 맥주를 혼자 4병째를 마시고 있었다.

괴로웠다. 기쁘지 않았다.

코시엘니가 골을 넣었지만 토튼햄이 골을 넣을 경우 복잡해지는 상황이었다.

토튼햄. 아스날의 런던 라이벌...

왜 나의 팀은 시즌 마지막 경기에 챔스 진출을 확정해야 하는가.

나의 팀이 왜 이렇게 되었나.


"뉴캐슬은 중위권팀이에요. 괴롭네요."

"왜요? 좋은 날 아닌가요? 그 플레이오프.. 아니. 그 챔피언스 리그에 나간다면서요."


그녀에게 나의 이 다행감과 동시에 드는 자괴감을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취해 있었다. 아니 취해 있지 않아도 지금 이 시간에 그녀에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글쎄요. 나가긴 해서 다행인데 다음 시즌에도 희망이 없어서요"

"왜 그러세요. 올해 LG는 다르듯이 아스날도 다를거에요"


그녀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아니면 이 카톡을 이어가야 하나?

취했다고 할까? 아니면 피곤하다고 할까? 자는척할까?


하는 와중에 그녀가 카톡을 보냈다.


"아 그런데 그 아스날 출신 반페르시가 득점왕을 했던데요? 축하드려요"



아... 

아스날을 버리고 라이벌 중의 라이벌 맨유로 간 

거기서 득점왕을 하고 맨유를 우승으로 이끈 반페르시를 축하한다고??


그녀와 더 만날 수는 없다.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잊고 있었던 감정이 다시 올라와.

나는 그녀와 헤어지려 하는 두 번째 이유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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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는 실제 저자와는 단 1%도 상관이 없는 순수 창작물입니다.  




 




Posted by 빨간까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