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량의 술을 마시고 새벽 네시에 들어왔는데 일곱시에 눈이 떠졌다. 음악을 틀고, 책을 보고, 빨래를 하고, 밥을 먹었다. 2월부터 친구들에게 '다음 달이면 주말엔 늘 일이 있을 것 같아'라고 했지만, 그런 다음 달은 오지 않고 5월이 되었다. 실제 직장에서의 달력을 봐도 5월에 서재페+학회만이 있을 뿐이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계시지만, 그건 요양차원이니까. 2주 연속으로 회식이 잡혀있지만, 그건 일상 아닌가.


일요일이면 늘 숙취에 시달리며 오후에나 일어났지만, 그렇지 않았다. 약속은 없지만, 집에서는 나가야 했다. 집에서 창밖을 보기에도 햇볕은 너무 따스했고, 고양이들도 창가에 앉아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즐겁니?'라고 물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는 없지만. 광화문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버스에서 졸았다. 덥긴 했지만, 후끈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아직 5월인걸. 본래 계획은 광화문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홍대로 가려고 했으나, 교보문고로 가기로 했다. 교보 앞에 빌딩에서는 루이비통의 전시가 있었다. 평생 관심 없고, LV 마크가 별로라고 생각했지만, 뭔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그 몇 년전에 일본의 작가와 콜라보 한 정신없는 물방울 무늬들은 괜찮았다. 전시는 그럭저럭 정신이 없었다. 포스터를 연신 접어주는 직원분께 미안했지만, 나도 하나 받았다. 벽에 이런 포스터 하나정도 붙여도 되겠지? 포스터는 셀렙들의 사진이 모자이크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갱스부르가 있는것이 맘에 들었다. 


그리고 교보에 가서 과학잡지를 한권을 샀다. 교보는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주말을 맞아 아이들을 데리고 반드시 외출을 해야하는 부모들에게 교보만한 공간이 있을까. 어딘가에 책이나 이런 것으로 아이들을 묶어 놓으면,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이 많으니까. 상대적으로 밀폐(?)된 공간이고. 나도 아버지랑 많이 갔었지. 그리고 이어폰도 필요했기에 샤오미에서 나온 걸 하나 샀다. 좋은건지 감별할 귀는 안되고, 나쁘지 않았다. 그 가격에 나쁘지 않으면 좋은거지.


만화방을 바로 갈까 하다, 아예 읽던 책을 더 읽기로 했다. 닉 혼비의 슬램. 어디로 갈까. 테라스 있는 북카페가 인근에 있을까. 홍대로 갈까 하다가, 북카페라는 곳에서 책을 읽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경복궁에 입장료를 내고 가서 자리를 하나 잡고 앉아 책을 읽었다. 경복궁 안에 있는 음료점에 가서 커피를 시켰다. 원래 커피는 잘 마시지 않지만, 유자차보다는 나았다. 레몬에이드를 마시고 싶었는데. 소설은 매우 재미있었다. 어느 시점까지는. 그 이후는 주인공을 시니컬하게 만들기 위해 무리하는거 아닌가 싶었지만, 주인공은 열여섯살밖에 안되니까. 열여섯살에 나는 마치 세상의 불핸은 혼자 다 짊어진척 말하고 돌아다녔다고. 그런 나보다는 낫지. 


경회루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닉혼비의 <슬램>을 낄낄거리며 읽는데, 요즘 계속 듣고 있는 검정치마의 <hollywood>의 뮤직비디오와 이미지가 겹쳤다. 시작하는 젊은 연인을 위한 노래. 노래도 그렇고 뮤직비디오도 그렇고 반짝반짝하는 그때를 부르는 노래. 하지만 가사도 그렇고, 뮤직비디오도 그렇고, 닉혼비의 슬램에서도 그렇고, 반짝반짝함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 오래 가지 않는걸 알고 있으니까 더더욱 시기를 하고, 아름답게 기억이 되는 것 아닌가. 늙어 죽을 때까지 빛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폴맥?


저녁 여섯시, 아침을 아홉시엔가 먹었더니, 슬슬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근래에는 배가 고파서 먹는다기 보다는 때가 되어서 챙겨먹고 있다. 배가 고프다고 안 먹다 보면, 어느새 본인의 짜증지수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기때문이다. 긴자 바이린에서 돈가스를 먹었다. 물론 오사카의 본좌집에는 못미치지만 맛있었다. 당연하지. 정식이 21000이었으니까. 생맥 9000해서, 삼만원.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격과 맛은 정비례하진 않지만, 비싼건 대체적으로 맛있다. 맥주를 마시며, 책을 마저 읽었다. 책은 파멸로 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중반부터 파멸상태였으나, 그 이야기를 주욱 끌고 갔다. 이거 너무. 현실같잖아..


마지막 남은 선택은 만화방을 갈까, 아니면 체크해 놓은 영화 스틸 앨리스를 볼까하다, 결국 상수동 만화방을 갔다. 그렇게 수십번을 갔는데도 또 넋놓고 걷다가 헤맸다. 여전히 내게 학습이란 없는건가 생각하려다, 말았다. 웃기잖아. 길은 언제든 잃을 수 있고, 찾으면 되지. 뭐 당연히, 3분도 되지 않아 찾았다. 


상수동 만화방은 이전 예정이라 한동안 못 볼 책들을 몰아봤다. 여긴 괜찮은 만화책이 많다고. 다른 곳에서 구석에서 억지로 찾아야할 만화책이 작가별로 모아져 있었다. 예전에 만화를 좋아한다고 했던 소개팅녀를 이곳에 데리고 온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래픽노블을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나는 그쪽은 잘 몰랐다. 그녀가 거기서 몇 권을 골라줬었다. 괜찮았다. 그녀는 마스다 미리의 광팬이었다. 그녀는 이름만 들어봤다던 최규석의 만화를 골랐다. 그리고 한시간만에 나가자고 했다. 그녀는 손에 물을 뭍혀본 적이 별로 없다는 것과 기독교도라는 것을 빼면 괜찮은 여자였다. 어쨌든.


안타깝게도 상수동 만화방에서 고른 만화들은 재미가 없었다. 잘 못 골랐다. 야한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주욱 봤는데, 정말 지나치게 한심할정도로 이야기가 엉망이었다.


집에 오면서, 역시 밴드를 해야겠다 생각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이런 생각을 한다. 살면서 가장 무료하지 않게 보냈던 때는 그래도 밴드할때였다. 정말 엉망인 실력에 연습도 잘 안 했지만, 즐거웠다. 그래서 즐거웠나? 일주일마다 한 번은 이런 생각을 하다가 한달 전쯤엔 대학동아리의 페북에 같이 할 사람 연락 달라고 했다. 그 동아리의 나는 1기 졸업생인데, 뭐랄까 같은 기수, 아니 그 동아리를 통털어도 나랑 같이 밴드를 할만한 애는 없긴 했다. 일단 내가 실력이 별로라는건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페북게 올린 글엔 좋아요만 30번 눌리고 연락 온 사람은 없었다. 집에 와서는 뮬을 검색해봤는데 마땅한 자리가 단 하나도 없었다. 콜플 카피같은거 하고 싶지 않다고. 펑크라고 해서 검색해서 나온 밴드 하나는 연주는 모르겠지만, 중학생? 아니 초등학생이 썼을법만 가사를 지껄이고 있었다. 아니 가사가 그 모냥이면 그냥 뭉개서 말하지..


집에 들어오니, 고양이들이 난리였다. 난 분명 하루치 밥을 주고 나왔는데, 또 달라고 난리다. 아 저 것들.. 이라 생각했지만, 하루 종일 먹는거 말고 별 일이 없는 아이들 아닌가. 밥을 더 줬다. 그리고 슬램을 마저 읽었다. 끝은 뭐 잘 마무리했다. 닉혼비의 책중에 제일 낮은 평가를 받는다고 했던데, 뭐 모르겠다. 내가 다 읽었어야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거 아닌가. 오아시스의 마지막 앨범들은 괜찮았다고 말 할 수 있는건 내가 오아시스의 전 앨범을 다 들었기때문이지.


뭐 그럭저럭 괜찮은 일요일이었다. 다만 올초에 얘기했던 '다음달에 주말부터는 계속 바쁠거야'는 오지 않는 것 같다. 안 바쁘면 좋지만 매주 같은 주말. 전날 술을 마신 상태에서 일어나서 월요일을 준비를 하는 그런 일요일. 심지어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리버풀-첼시 경기는 이게 내가 작년에 본건지 그 전에 본건지도 모를듯한 몇 번은 본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Posted by 빨간까마구